耶律楚材는
몽골(Mongol) 帝國의 太祖[Genghis Khan 成吉思汗, 1162~1227], 太宗[Ogadai 窩闊台, 1229~1241]을 補佐하여 世界帝國을 建設한 宰相 입니다.
그는 有能한 政治家이자 學者일 뿐만 아니라 性品이 沈着, 淸廉, 剛直하고 忠孝가 至極하여 庶民과 皇帝로부터 두터운 信任을 받은 이로 모든 사람의 龜鑑이 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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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1. 至元元年, 加光祿大夫. 奏定法令三十七章, 吏民便之. 二年, 行省山東. 未幾徵還. 初, 淸廟雅樂, 止有登歌, 詔鑄製宮懸八佾之舞. 四年春三月, 樂舞成, 表上之, 仍請賜名大成, 制曰 「可」. 六月, 改榮祿大夫, 平章政事. 五年, 復拜光祿大夫, 中書左丞相. 十年, 遷平章軍國重事. 十三年, 詔監修國史. 朝廷有大事, 必咨訪焉. 十九年, 拜中書左丞相. 二十年冬十月, 坐不納職印, 妄奏東平人聚謨爲逆, 間諜幕僚, 及黨罪囚阿里沙, 遂罷免, 仍沒其家資之半, 徙居山後. 二十二年卒, 年六十五.
子十一人, 希徵, 希勃, 希梁, 希寬, 希素, 希固, 希周, 希光, 希逸淮東宣慰使, 餘失其名. 至順元年, 贈推忠保德宣力佐治功臣, 太師, 開府儀同三司, 上柱國, 懿寧王, 諡文忠.
21. 至元 元年(1264) 光祿大夫을 더하였고, 上奏하여 法令 37章을 定했는데, 吏民이 이것으로 인해 便利했다. 2年 行省山東이 되었고, 얼마 後 부름으로 돌아왔다. 過去[初,以前也-역주] 淸廟雅樂에 단지 登歌[樂懸, 樂器를 配列하는 方法의 하나-역주]만 있어 鑄에게 詔書를 내려 宮懸八佾之舞[天子太廟의 樂器, 國家 大祭時의 文武舞-역주]를 만들게 하였다. 4年 봄 3月 樂·舞가 完成되었으며, 表를 올려 大成이라는 이름을 請하자 이를 下賜하였다. 6月 榮祿大夫·平章政事로 바뀌었고, 5年 다시 光祿大夫·中書左丞相 되었으며, 10年 平章軍國重事로 바뀌었다. 13年 詔書를 받아 監修國史가 되었다. 朝廷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諮問을 求했다. 19年 다시 中書左丞相이 되었고, 20年 겨울 10月에 不納職印·妄奏東平人聚謀爲逆·間諜幕僚及黨罪囚阿里沙 (사건에) 連坐되어 드디어 罷免되었고, 이에 그의 집 資産 半을 沒收 당했으며, 山後에 옮겨 살았다. 22年에 죽었으니 나이 65세 였다.
아들은 11사람을 두었는데, 希徵, 希勃, 希亮, 希寬, 希素, 希固, 希周, 希光이며 希逸이 淮東宣慰使였고, 그외 이름은 모른다. 至順 元年 推忠保德宣力佐治功臣·太師·開府儀同三司·上柱國·懿寧王으로 追封되었고 諡號는 文忠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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